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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교육 과정 변천사

대한민국은 유아, 초등, 중등, 고등, 평생교육 다섯 단계로 구분이 되며 그 중 초등학교 과정과 중학교 과정은 의무과정이기 때문에 교육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학년 과정은 6·3·3·4 제로, 모든 학생이 동일한 과정을 이수해야 하는 학년 과정입니다. 대한민국 부모님들의 교육열에 힘입어 학생들 대부분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며, 대학에 가는 학생들은 전체 학생의 2/3에 달한다. 대한민국은 우수한 성적을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수 십년간 달성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교육의 역사는 시초는 고조선 위만 에게 박사의 직급을 하사하며. 중국에서 한자를 들여와 사용할 만큼 삼국시대 초기에는 기초적 교육 체계가 발달하였으며, 이후 중국의 무예를 연마하며 유학을 흡수하여 인재 육성에 크게 힘썼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최악의 제도인 음서제도와 함께 중국의 과거를 본떠 만든 과거제도가 이어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성균관, 집현전, 서당으로 이어져 학문을 닦았습니다. 일본 강점기에는 서양의 근대적 교육 제도가 도입되었다.

우리나라에 19세기 말부터 신분제가 사라짐과 함께 근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동시에 양반들만 교육받고 입신양명할 수 있는 일종의 권한이 사라졌고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발맞춰 부모들은 돈을 벌어서 자식들의 학비를 마련해서 ‘개천에서 용 난다’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시켰고, 자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였으며, 1953년 휴전 직후에는 교육기관이 남아 있지 않았다. 국가적으로 학생들을 서양이나 선진국과 같은 나라로 유학을 보냈으며 학위를 딴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학계, 산업과 같은 각종 분야로 진출하여 인재 양성과 산업 발전, 사회 정비에 힘쓴 결과 대한민국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해방 직후 미국의 군정 기간 (3년), 현대 대한민국 교육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사회 질서를 갖춘 자유 민주 국가로 탈바꿈시켜 남한을 미국과 같이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을 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인의 협력을 해야 했고, 교육 분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멸공과 반공의 이념이 강한 자유민주주의 한국인 미국 유학생들을 선발하여 미군정과 한국교육위원회 등에 임명하였습니다.

미국은 실업학교, 인문학교의 학교 교과 과정이 분리되어 있던 과정을 하나로 바꿈으로써, 과정을 분리하여 기인한 빈익빈 부익부 의한 차이를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또한 아메리칸 수업 교과 과정을 도입하여, 학교 교과 과정을 6·3·3·4 제로 재편성하였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상당한 교육열과 남한의 자유 민주주의를 고착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초등학교 교육을 의무화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재편은 투자를 전혀 하지 않고 교육 기회에 대한 부분만 보완해 왔기 때문에 80~110명이 한 개의 반에서 수업받는 과적된 학급과 오전 오후반으로 나뉘는 2부제, 3부제 수업 시행 등 많은 이슈가 발생하였습니다. 게다가 고학력자가 해마다 졸업하지만 수는 한정적이어서 심각한 실업률이 나타났으며, '학력 가수요 현상'이 나타났으며, 취업하지 못한 졸업생들이 고등교육을 갖춘 학교에 진학하려는 입시 경쟁과 학력 인플레이션과 가져왔다. 현대의 대한민국 교육 병폐는 여기에서 나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또한, 제도 및 교과 과정 개선만으로는 교육을 개혁할 수 없다며 학교와 민간인에게서는 '새교육 운동'을 펼쳤습니다. 전과 같은 주입식 교육 수업을 지양하고 미국이 지도한 ‘새교육 운동’은 학생들이 그룹을 형성하여 발표, 토론을 진행하며 수업을 하는 것을 지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실패하였는데, 모두가 일제의 주입식 강의 수업에 학생과 선생님 두 그룹 모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입시 경쟁이 점차 치열해지면서 주입식 교육인 강의식 수업이 입학에 유리하다는 민심이 형성하였는데 "새교육 운동하면 실력이 떨어진다."는 학부모들 사이 소문이 퍼졌으며, 현재와 같은 주입식 강의 수업이 한국 교육에 자리를 잡아 버렸습니다.



1대 대통령인 이승만 정부에서는 교육법이 제정 및 공포되었다. 6, 25전쟁이 시작하고 정부는 '전시할 교육 특별 조치 요강'을 발표, 비록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학생들에게 계속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였으며, 전 세계적으로 이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55년에는 최초의 교육과정인 대한민국이 스스로 만든 1차 교육과정이 제정되었습니다. 교육철학이 반영되었으나, 주입식 강의 교육이 유리한 입시에는 실제로는 교과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2대 대통령 장면 정부에서는 교육자치제 강화, 학원 민주화 방침을 만들어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61년에 박정희 중심의 일부 군부 세력이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책을 시행하지도 못한 채 아무 성과 없이 사라졌습니다. 3대 대통령 박정희 정부는 아래 '교육을 통한 인간 개조 운동’과 '조국 근대화 추진하였습니다. 이 추진으로 인하여 '교육에 대한 임시특례법'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교수와 대학생, 각종 학교 재단 등 군사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집단을 통제하기 위한 법안이었습니다. 군부 통치를 마치고 63년에 발족한 제3 공화국은 68년 중학교 입시를 폐지, 시험 없이 중학교를 진학하게 하였으며, 오늘날의 수능의 모태인 '예비고사'를 도입하였다. 전면적인 개혁안으로 평가받는 중학교 입시 폐지는 ‘어린이 해방’이라 일컬어질 만큼 중학교 입학 입시로 인한 폐단을 상당 부분 개선하였습니다. 대학 고유 권한을 침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대학입학예비고사 실시에 반대하였으나 강행하여 시행되었고, 오늘날 수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